– 심심한 여가가 아닌, 내 삶의 리셋 버튼 -
“이 프로그램... 나랑 어울릴까요?”
“뭐든 해보는 거지. 당신, 그림 좋아했잖아.”
“근데 나, 뭘 좋아했는지도 잘 모르겠어.”
퇴직 후 처음으로 복합문화센터를 찾은 중년 부부의 대화다. 익숙했던 일상은 멈췄지만, 남겨진 시간은 낯설기만 했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수채화 강좌를 살펴보고, 남편은 디지털 사진 수업 게시판 앞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오랜 시간 가족과 일에 헌신하며 자신의 ‘기호’는 접어둔 채 살아왔던 이들. 지금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다. “내가 좋아했던 건 뭐였지?”라는 질문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인생 2막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신중년에게 ‘취미’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이는 단지 여가의 보너스를 넘어, 무너진 삶의 리듬을 복구하고, 고갈된 정서의 샘을 다시 채우는 회복의 도구다. 공무원연금공단의 『100세 시대 퇴직설계』에서도 여가활동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실천 수단으로 강조되며, 삶의 질 유지에 필수 요소로 제시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잘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나답게, 편안하게, 소소하게”를 기준 삼아야 한다. 독서, 그림, 여행, 정원 가꾸기, 요가, 자전거 타기, 사진 촬영, 캘리그래피 등은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한때 마음에 품었지만 미처 꺼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소일거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험 기반의 지식과 기술은 제2의 삶에서 새로운 역할을 창출한다. 예를 들어 영상 편집을 배운 60대 여성은 자신의 여행기를 유튜브 채널로 공유하며 6개월 만에 3천 명 이상의 구독자를 모았다. “처음에는 그냥 기록이었지만, 이제는 나의 일이자 사명이 됐다”고 말한다. 캘리그래피를 배운 은퇴 공무원은 동네 주민센터에서 무료 수업을 열어 지역 어르신들과 정기 모임을 만들었고, 지역신문에 그의 활동이 소개되기도 했다.
2024년 기준, 전국의 50+세대를 대상으로 개설된 문화예술·취미 프로그램은 약 9,800개에 달했으며, 참여자 만족도는 평균 83.2%로 나타났다(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24). 취미활동은 개인의 즐거움을 넘어 공동체 참여와 재능 나눔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혼자 즐기는 여가’에서 ‘함께 만드는 취미 공동체’로의 이동은 신중년 리부트의 핵심 키워드다. 친구들과 ‘50+ 글쓰기 모임’(50세 이상 중장년 세대가 주축이 된 지역 커뮤니티)을 운영하거나, 부부가 함께 여행 채널을 꾸려 일상을 기록하는 활동은 더 이상 단순한 여가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감각’을 되찾는 리부트(reboot)의 실천 장면이다.
더 나아가 ‘취미-기부-재능공유’로 이어지는 선순환도 확산되고 있다. 뜨개질한 모자를 요양원에 기부하거나, 디지털 콘텐츠 제작을 배운 신중년이 고령층 유튜브 채널을 운영 도와주는 사례도 있다. 이는 개인의 취미가 사회적 의미로 확장되는 과정이며,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재부여하는 시간이다.
‘취미’는 결국 나를 위한 삶의 재배열이다. 생존을 위해 달려온 삶에 쉼과 의미를 다시 불어넣는 설계 도구이며, 때로는 인생의 새 기회를 여는 디딤돌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낡은 기타 줄을 다시 튕기거나,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구름을 찍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중요한 것은 다시 ‘내 삶의 감각’을 복원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가장 좋은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 카렌 램(Karen Lamb)
지금의 작은 시작이 나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주저하지 말고, 단 한 발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취미는 삶을 되살리고, 신중년의 시간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리부트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고 지속적인 행동으로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