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이 끝이 아닌 이유, 삶은 아직 호출 중이다 -
“아버지, 오늘도 정장 입고 어디 가세요?”
“응, 행정복지센터에 강의 들으러 가야지.”
“아니, 벌써 은퇴하셨다면서요? 그냥 좀 쉬시지…”
“은퇴는 아직 안 했어. 퇴직만 했지.”
“… 그게 그거 아닌가요?”
“절~대 다르지. 퇴직은 일터에서 물러나는 거고, 은퇴는 사회적 역할에서 빠지는 거야. 난 아직 세상 속에 있어.”
이 짧은 대화는 신중년이 마주하는 가장 흔한 오해를 보여준다. ‘퇴직=은퇴’라는 등식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지만, 평균 기대수명이 84.3세에 이른 지금. 정년이라는 제도적 마침표는 더 이상 삶의 종점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중요한 선택은 그 이후에 시작되며, 퇴직은 새로운 국면으로의 진입점이다.
퇴직 이후의 시간은 그 자체로 ‘제2의 궤도’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퇴직이 곧 은퇴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 중간 단계에 ‘경험의 재설계기’가 존재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닌, 의미와 존재 가치를 되짚는 이 전환기는 흔히 ‘인생 2모작’이라 불린다. 바로 이 지점이 퇴직자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출발선이다.
공무원연금공단(2024)에 따르면, 퇴직 후 3년 이내에 무직 상태로 전환된 이들은 전체 퇴직자의 38%에 이르며, 이 중 절반가량이 “할 일이 없어 불안하다”라고 응답했다. 반면, 퇴직 직후부터 생애설계 교육이나 사회공헌 활동을 병행한 이들은 신체·심리 건강지표는 물론, 삶의 만족도와 사회적 관계 유지에서도 우수한 결과를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퇴직의 정의에 대한 인식 차에서 비롯된다. 직장에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는 사람과, 사회 속에서 나의 경험과 역할을 어떻게 재배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의 삶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후자의 경우, 행정복지센터의 평생학습 강좌나 ‘라이프디자인센터’의 생애설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경력의 새로운 쓰임새를 찾는다. ‘한 세대를 이끈 경력’이 ‘사회적 자산’으로 환원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특히 공공 부문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인사혁신처와 공무원연금공단이 운영하는 「퇴직공무원 사회공헌사업(Know-how+)」은 퇴직 공직자들의 전문성과 공직 경험을 활용해 행정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대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민원상담, 보이스피싱 예방, 청소년 멘토링, 재난 안전 활동, 농촌 기술 전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분야는 점점 더 확대되는 추세다.
사업 운영 실적 또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2년에는 38개 사업에 295명의 퇴직공무원이 참여했으며, 2023년에는 39개 사업으로 늘어나며 321명이 활동했다. 2024년에는 45개 사업으로 확대되며 전국적으로 총 371명의 퇴직공무원이 생애 2막의 길을 열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퇴직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 역할 수행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제 사례도 많다. 충북의 한 은행에서 활동 중인 김효동 씨는 37년 경력의 퇴직 경찰관으로, 금융범죄 예방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는 고객의 행동을 포착해 피해를 사전에 차단한다. 한 70대 어르신이 주식 투자 사기에 속아 거액의 이체를 시도하던 순간, 김 씨가 은행 직원의 요청으로 현장에 출동해 어르신을 설득하며 피해를 막아낸 일은 JTBC 뉴스에도 소개될 만큼 주목받았다.
이처럼 퇴직은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다시 배치하는 ‘포지션 변경’에 가깝다. 경기를 마친 교체 선수가 아니라, 포메이션을 바꾸어 다른 전략으로 경기에 복귀하는 것과도 같다. 사회는 여전히 이들의 경험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진짜 과제는 신중년의 준비와 사회의 인식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여전히 퇴직을 사회적 은둔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시작하기엔 나이가 많아”라거나, “괜히 설치다 더 피곤할 뿐이야”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피로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는 시간에서 비롯된다. 단절된 일상과 고립된 사회적 연결은 신중년을 더욱 빨리 노화시킨다. 퇴직 이후의 생애설계는 선택이 아닌 ‘대응력’의 문제다.
지금 당신은 퇴직을 인생의 종결로 보는가, 아니면 삶의 다음 챕터를 여는 기회로 보는가?
“은퇴는 내가 결정해. 퇴직은 그들이 정했지만, 나는 여전히 나로 산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의 인생 3모작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