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Whisk 생성
이미지 / Whisk 생성

2021년 케빈 맥도널드 감독이 연출한 ‘모리타니안(The Mauritanian)’은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인권 유린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관타나모 수용소라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고문과 불법 구금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2001년 9·11 테러 직후 ‘모리타니’에서 평범하게 살던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타하르 라힘)가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어떤 혐의로도 기소되지 않은 채 쿠바 관타나모만의 미군 기지 수용소로 이송되어 14년간 구금당한다.

슬라히를 변호하게 된 인권변호사 낸시 홀랜더(조디 포스터)는 처음에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사 기록을 파헤치면서 그가 고문을 통해 강요된 거짓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편 군 검찰관 스튜어트 쿠치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은 9·11 테러로 친구를 잃은 개인적 복수심으로 슬라히를 기소하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그가 받은 비인도적 고문의 증거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슬라히가 관타나모에서 겪은 극한의 고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수면 박탈, 성적 굴욕, 종교적 모독, 가족에 대한 위협 등 체계적인 고문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테러 계획을 자백하도록 강요받는다. 특히 토론토 CN타워 폭파 계획을 자백하는 장면은 고문이 어떻게 무고한 사람을 거짓 증언으로 내몰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시대와 관타나모의 법적 공백

‘모리타니안’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 방지라는 명목 하에 기존의 법적 프레임워크를 벗어난 극단적 조치들을 정당화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상징적 산물이다.

쿠바 영토 내에 위치하지만 미국이 운영하는 이 수용소는 의도적으로 법적 공백지대로 설계되었다. 미국 본토가 아니므로 미국 헌법의 보호를 받지 않고, 쿠바 영토도 아니므로 쿠바 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법외 상태는 구금자들을 완전히 무권리 상태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인해 이러한 극단적 조치들을 묵인했다. '적성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제네바 협약의 적용도 배제했다. 영화는 이런 시대적 광기가 어떻게 무고한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슬라히가 당한 고문 시퀀스들이다. 특히 그가 성적 굴욕을 당하고 종교적 신념을 모독당하는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깊은 충격을 준다. 감독은 이러한 장면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심리적 효과에 중점을 두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쿠치 중령이 고문 증거들을 발견하고 양심의 갈등을 겪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9·11 테러로 친구를 잃은 그의 개인적 복수심과 법관으로서의 직업 윤리 사이의 갈등은 당시 미국 사회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그가 슬라히의 기소를 포기하는 결정은 양심과 정의가 승리하는 순간으로 그려진다.

홀랜더 변호사가 슬라히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의 놀라운 관용과 유머를 발견하는 순간도 잊을 수 없다. 14년간의 고문과 구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성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가 테러리즘과 현대 제국주의의 실상

‘모리타니안’은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어떻게 또 다른 형태의 테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하에 자행된 불법 구금, 고문, 인권 유린은 테러리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화는 테러리즘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국가가 자행하는 조직적 폭력과 개인이나 집단이 자행하는 테러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슬라히가 당한 고문과 심리적 테러는 9·11 테러 못지않게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다.

특히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 실제로는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미국이 표방하는 법치주의와 인권 존중이라는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다.

영화는 현대 제국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연구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 세계 어디서든 자국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체포하고 자국이 통제하는 법외 지대로 이송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다.

슬라히의 경우처럼 요단, 아프가니스탄, 쿠바를 거치는 비밀 이송 과정은 현대적 형태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보여준다. 전통적 식민주의와 달리 직접적 영토 점령 없이도 글로벌 차원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관타나모 수용소 자체가 제국주의적 공간의 전형이다. 쿠바 영토 내에 있지만 미국이 영구 임대한 이 기지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조차지를 연상시킨다. 법적 모호성을 이용해 인권 침해를 자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종교적 근본주의 비판과 진정한 종교적 가치

영화는 종교적 근본주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서구의 종교적・문화적 우월주의를 비판한다.

슬라히에 대한 고문에서 종교적 모독이 핵심적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고통을 넘어 그의 정체성과 신념 체계 자체를 파괴하려는 시도다. 이런 방식의 고문은 이슬람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편견을 바탕으로 한다.

동시에 영화는 슬라히의 관용과 용서를 통해 진정한 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고문을 자행한 간수와도 우정을 나누는 그의 모습은 복수가 아닌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이다.

현재진행형 문제와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

‘모리타니안’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바이든을 거쳐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테러와의 전쟁'으로 시작된 인권 침해는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테러 방지라는 명분은 현재에도 언제든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슬라히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반복될 수 있는 인권 침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가 안보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균형, 테러 방지와 인권 보호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곧 이 사건은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적 경고를 담고 있다.

비록 ‘모리타니안’이 서구중심적 시각에서, 복잡한 정치적・법적 문제들을 너무 단순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9·11 이후 미국이 자행한 인권 침해의 실상을 고발하고, 국가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이 영화는 진정한 안보는 공포와 복수가 아닌 정의와 인권 존중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슬라히의 용서와 관용은 증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할 가치임을 일깨워 준다.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인미래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