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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2013년 작품 ‘설국열차’는 단순한 SF 디스토피아 영화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지구 온난화 해결책이 빚어낸 비극적 역설을 배경으로,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이 탄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냉정하게 해부한다.

줄거리: 얼어붙은 세계 속 마지막 방주

2031년,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79개국이 합의해 살포한 냉각제 CW-7은 예상과 달리 지구 전체를 얼려버렸다. 살아남은 인류는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설계한 자급자족 열차 '설국열차'에서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열차는 438,000km의 철궤를 1년 주기로 순환하며 지구의 공전을 대신한다.

열차 안에서도 계급은 존재한다. 꼬리 칸의 무임승차자들은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며, 앞칸으로 갈수록 호화로운 삶을 누린다. 17년이 지난 어느 날, 꼬리 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의 지시 하에 앞칸을 향한 혁명을 시작한다.

사회적 배경: 환경 재앙과 계급 고착화

영화의 사회적 배경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환경 위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선진국 주도의 지구 온난화 해결책은 결국 더 큰 재앙을 불러왔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한 채 진행된 CW-7 살포는 "힘의 논리가 행하는 소수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상징한다.

이러한 재앙 이후 형성된 설국열차 사회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폐쇄적 시스템이다. 열차 밖은 죽음의 공간, 열차 안은 생존의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지배하며, 이는 열차 체제에 대한 절대적 순응을 강요하는 가장 강력한 전제가 된다.

계급 갈등: 칸과 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

설국열차의 가장 핵심적인 메타포는 열차의 각 칸이 상징하는 계급 구조다.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의 7분 연설은 이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내 자리는 머리 위고, 너희들 자리는 발밑이야. 각자의 자리는 애초부터 티켓에 나와 있어. 신성한 엔진이 영원한 질서를 정해놓았어."

이 "영원한 질서"는 엔진을 신성시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엔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류 생존의 상징이자 권력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잔혹함은 인구 조절을 위한 "7인의 반란"이나 "맥그레거 폭동"이 실제로는 꼬리 칸 인구를 74%로 줄이기 위해 윌포드와 길리엄이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사회불평등의 구조적 분석

영화는 사회불평등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정당화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탑승 티켓의 종류(일등석, 일반석, 무임승차)가 곧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카스트 제도가 된 것이다. 이는 "태생적 불평등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꼬리 칸 사람들의 "자연권적 평등"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꼬리 칸 내부에서도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논리다. 초기 식량 부족 시기에 커티스는 약자를 잡아먹는 포식자였고, 길리엄의 자기희생을 통해서야 이런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과 동시에, 도덕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미래 디스토피아의 함의

설국열차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 귀결이다. 열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원의 한계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는 "최적의 균형"이라는 명목하에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한다. 윌포드의 말처럼 "이 열차는 폐쇄된 생태계라 늘 균형을 맞춰야 하지. 공기, 물, 음식도 그렇지만 특히 인구는 균형을 맞춰 놓아야 해."

하지만 이 균형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앞칸의 사치스러운 삶과 꼬리 칸의 참혹한 현실 사이의 격차는 현재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대화한 모습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꼬리 칸의 아이들을 열차 부품으로 사용하면서도 이를 당연시하는 윌포드의 모습에서 보듯, 시스템은 인간을 단순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인생철학: 혁명과 좌절, 그리고 선택

커티스의 여정은 단순한 계급 투쟁을 넘어선 인생철학적 탐구다. 그는 혁명을 통해 윌포드를 제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결국 깨닫게 된다. 엔진을 차지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고 제안하지만, 이는 결국 같은 시스템의 연장일 뿐이다.

길리엄의 배신 역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현실적 타협과 이상적 원칙 사이에서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길리엄은 더 큰 지옥을 막기 위해 작은 악을 선택했지만, 이는 꼬리 칸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남궁민수(송강호)의 존재는 또 다른 철학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열차 밖 세계의 가능성을 믿고, 열차 자체를 파괴하려 한다. 이는 기존 시스템의 개혁이 아닌 완전한 전복을 의미한다.

마지막 장면의 의미: 파괴 후의 창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요나와 티미 두 아이가 열차 밖으로 나와 북극곰과 마주하는 모습은 다층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봉준호 감독은 이를 희망적 메시지로 의도했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논란이 있다.

긍정적 해석으로는 북극곰의 생존이 지구 생태계의 회복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북극곰은 지구 온난화 피해의 상징적 동물이었고, 육식동물의 생존은 완전한 생태계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또한 두 아이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상징할 수 있다.

하지만 비관적 해석도 만만치 않다. 17세 소녀와 5세 소년만이 굶주린 북극곰 앞에 남겨진 상황은 인류 멸종의 전조로 읽힐 수 있다. 문명의 파괴 후 원시 상태로의 회귀가 과연 희망인가 절망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이 장면의 핵심은 "창조를 위한 파괴"라는 개념이다. 기존 시스템의 완전한 해체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인류 문명 자체의 소멸일 수도 있다.

현재를 비추는 차가운 거울

‘설국열차’는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의 문제를 다룬다. 환경 위기, 계급 갈등, 사회불평등, 권력의 독점과 남용 등 우리 시대의 핵심 쟁점들이 설국열차라는 극한 상황에서 압축적으로 재현된다.

영화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은 이것이다 : 불의한 시스템 안에서의 안정적 생존과 불확실하지만 자유로운 미지의 세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혁명을 통한 점진적 개혁과 시스템 자체의 완전한 파괴 중 어느 것이 진정한 해답인가?

봉준호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각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로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설국열차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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