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7년 작품 ‘더 포스트’는 단순한 정치 스릴러를 넘어서 언론의 본질적 가치와 사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라는 거장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1971년 ‘펜타곤 페이퍼스’ 사건을 재조명한 이 영화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언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 줄거리
영화는 1971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국방부 분석가였던 댄 엘스버그가 7,000페이지에 달하는 정부 기밀문서를 유출한다.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스'라 불리는 이 문서는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에 이르는 네 명의 대통령이 30년간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국민들을 속여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었다.
뉴욕타임스가 이 문서를 최초로 보도하자 닉슨 정부는 국가기밀법을 근거로 출간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때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극도의 딜레마에 빠진다. 경쟁지인 뉴욕타임스가 발목 잡힌 상황에서, 과연 정부의 압박과 법적제재를 무릅쓰고 진실을 보도할 것인가?
특히 캐서린 그레이엄에게는 더욱 복잡한 상황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주식 상장을 앞두고 있었고, 정부와의 갈등은 신문사의 존립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더욱이 남편이 자살한 후 신문사를 물려받은 그녀는 남성 중심의 언론계에서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언론의 사명: 권력 감시와 진실 추구
‘더 포스트’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언론의 근본적 사명에 관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벤 브래들리가 "우리가 섬기는 것은 국민이지, 통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언론의 본질을 꿰뚫는 명대사다.
정부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진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보여준다. 펜타곤 페이퍼스가 폭로한 것은 단순히 전쟁의 실상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얼마나 쉽게 국민을 기만할 수 있는가 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위기였다.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국익과 국가 안보를 위해 은폐돼야 하는 진실은 없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한다. 권력의 견제와 감시라는 본연의 역할을 포기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기자정신의 구현: 용기와 소신
영화에서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이 보여주는 기자정신은 현재 우리 언론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의 압박과 법적제재 위험 속에서도 진실을 파헤치려는 기자들의 모습은 저널리즘의 이상적 모델을 제시한다.
특히 톰 행크스가 연기한 벤 브래들리는 경험 많은 편집국장으로서 정치적 압력과 상업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언론인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는 "출판할 자유를 보호하려면 출판이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진정한 기자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는 언론인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적 딜레마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신문사의 경영진과 기자들 사이의 갈등, 정부와의 관계, 광고주들의 압력 등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저널리즘의 핵심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진실 추구의 의미와 가치
펜타곤 페이퍼스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단순히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힌 것을 넘어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실이 갖는 절대적 가치를 확인한 사건이었다. 정부가 아무리 국가 기밀이라고 주장해도,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은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영화는 진실 추구가 단순히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권력자들의 거짓말을 그대로 두면, 그것은 더 큰 거짓말을 낳고 결국 사회 전체를 부패시킨다. 따라서 언론의 진실 추구는 개인의 영웅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책무인 것이다.
특히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대법원이 6대 3으로 언론의 손을 들어주는 장면은 사법부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1970년대 여성 언론인의 현실과 도전
‘더 포스트’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1970년대 여성 언론인이 직면했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점이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 그레이엄은 미국 여성 최초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 된 인물로, 당시 남성 중심의 언론계에서 겪어야 했던 편견과 차별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영화 초반 캐서린이 이사회에서 발언하는 장면들은 당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 이사들은 대놓고 "사교계에서야 능력이 있지 언론사 회장으로서는 자질이 없다"며 면박을 주고, 중요한 결정에서 그녀를 배제하려 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 결정적 순간에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 펜타곤 페이퍼스 보도를 결정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리더십은 단순히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언론인으로서의 소명 의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인터뷰에서 "1970년대 여자의 리더십을 정의한 이야기여서 더 특별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캐서린 그레이엄은 미국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비즈니스 리더 리스트에 여성 최초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적 의미와 교훈
‘더 포스트’가 2017년에 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불거진 언론과 정부 간의 갈등, '가짜 뉴스' 논란, 언론의 신뢰도 하락 등 현재 미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과 1971년의 상황이 많은 부분에서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과 언론의 관계,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 속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진정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언론인의 소명 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를 맞아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현실에서, 언론의 게이트키퍼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더 포스트’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하나의 답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취약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이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지켜나가야 할 가치이며, 모든 시민이 함께 참여해야 할 과제임을 강조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 만의 것이 아니라 민주시민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