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함이 사라지면 남는 관계가 ‘진짜 자산’이다 -
퇴직을 앞둔 한 공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많은데, 막상 연락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수백 개의 번호가 있었지만, 마음 편히 전화를 걸 상대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관계는 직책과 조직이라는 껍질 속에서 유지되었기에,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의 절반이 함께 사라졌다. 그는 사회적 역할의 옷을 벗으며, 자신이 얼마나 ‘직함의 관계’ 속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통계청 「사회조사(2024)」에 따르면 60대 이상 인구의 43.7%가 “친구나 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고 답했고, 서울시복지재단 「65+ 고립지표 보고서(2024)」에서는 37.5%가 고립 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퇴직 후 3년 이내 남성의 사회적 관계 축소 속도는 여성보다 2.3배 빠르며, 이러한 단절은 우울감과 무력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 이후의 공백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사라지는 심리적 단절의 문제일 것이다.
관계는 인간의 정서적 면역체계이며, 일과 건강, 학습과 행복을 이어주는 숨은 축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조직이 대신 설계해준 관계에 익숙해 있다. 회사가 사라지면 관계도 함께 사라지는 이유다. 이제는 조직의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구축한 ‘가치의 관계망’을 다시 세워야 할 때다. 퇴직 후의 사회적 회복은 일의 성공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서 출발할 것이다.
관계의 리셋은 단순히 사람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속도를 맞추는 일이다. 명함 중심의 인맥에서 벗어나, 신뢰와 공감으로 연결된 이중 구조의 관계망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먼저 소수의 깊은 관계를 남기고, 그 위에 느슨하지만 폭넓은 연결을 더하는 방식이다. 깊은 관계는 삶의 고비마다 조언과 지지를 줄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며, 느슨한 관계는 정보와 기회를 전달하며 삶의 외연을 넓히는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 두 층위가 균형을 이룰 때, 관계는 나이를 넘어 지속적인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관계의 포트폴리오는 정서적, 학습적, 사회적 기여라는 세 축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정서의 축에서는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학습의 축에서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동반자를, 그리고 기여의 축에서는 내가 사회에 돌려줄 수 있는 연결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 세 방향을 따라 자신의 인간관계를 정리한다면, 직책이 아닌 가치로 이어지는 네트워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관계 설계의 출발점은 지역사회의 학습과 참여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평생학습통계(2024)」에 따르면 학습 공동체나 자원봉사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중장년의 62%가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응답했다. 서울 은평구의 ‘50+배움동아리’, 부산의 ‘은퇴자 마을멘토단’은 관계를 재구성한 대표적 모델이다. 배움과 봉사를 함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퇴직 후의 관계는 숫자가 아니라 온도의 문제이다. 명함의 개수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불러줄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관계는 축적이 아니라 재구성의 과정이며, 단절을 받아들이는 대신 새롭게 의미를 엮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세대는 ‘관계 관리’가 아닌 ‘관계 리더십’을 배워야 할 것이며, 인생 3모작의 주역은 결국 가치로 연결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나는 퇴직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연락하는 사람이 다섯 명 이상 있는가,
나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배우는 협력 네트워크가 존재하는가,
새로운 모임이나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나의 관계는 직업이 아닌 가치로 이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타인과의 협력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 다섯 질문 중 두 가지 이상이 ‘아니오’라면, 당신의 관계는 아직 재생되지 않았다.
퇴직 이후의 진짜 경쟁력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혼자 일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고, 협력할 줄 아는 사람만이 변화의 속도 속에서 살아남게 될 것이다. 관계의 재생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복원이 아니라 사회적 리듬의 회복이며, 누군가와 함께 배우고 나누고 다시 일어서는 그 순간, 퇴직은 더 이상 단절의 문이 아니라 연결의 통로가 될 것이다. 결국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곧, 미래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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