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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스파이크 리 감독이 연출한 ‘말콤 X’는 단순한 전기 영화를 넘어 20세기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깊이 있게 탐구한 걸작이다. 덴젤 워싱턴의 압도적 연기력으로 재현된 말콤 X의 생애는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각성이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언이다.

말콤 X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 세 단계의 변화

영화는 말콤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그려낸다. 첫 번째는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나 미시간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 블랙 리전이 집을 불태우고 인권운동가였던 아버지를 살해했지만 자살로 처리되어 보상금조차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콤은 변호사의 꿈을 품었지만 백인 교사는 "흑인은 손으로 하는 일을 해야 한다"며 그의 꿈을 좌절시킨다.

두 번째 단계는 1940년대 보스턴과 할렘에서의 범죄자 시절이다. '디트로이트 레드'라 불리던 말콤은 백인 연인 소피아와 함께 강도질을 일삼으며 암흑가의 삶에 빠져든다. 숫자 노름을 운영하는 갱스터 '웨스트 인디언' 아치와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결국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특히 백인 여성들과의 관계 때문에 가중처벌을 받는 장면은 당시의 인종차별적 사법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세 번째 단계는 감옥에서의 종교적 각성과 이후의 정치적 활동이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NOI)의 교리를 접한 말콤은 자신의 성을 노예주인의 이름인 '리틀'에서 잃어버린 아프리카 조상을 상징하는 'X'로 바꾼다. 출소 후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제자가 되어 NOI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흑인 분리주의를 설파한다.

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말콤의 또 다른 변화에 있다. 1964년 메카 순례에서 다양한 인종의 무슬림들과 만나며 인종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NOI에서 탈퇴해 범아프리카주의 단체인 흑인단결기구를 창설한다. 1965년 2월 21일, NOI 신봉자들의 총격으로 39세의 생을 마감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1925-1965년: 격동의 미국 흑인사 40년

‘말콤 X’는 1925년부터 1965년까지 40년간의 미국 역사를 관통한다. 이 시기는 흑인들이 남부의 농노적 삶에서 벗어나 북부 도시로 이주하는 '대이주' 시대였고, 동시에 체계적인 인종분리정책인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 공고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는 1920-30년대 ‘마커스 가비’의 아프리카 회귀 운동부터 1960년대 민권운동에 이르기까지 흑인 해방 사상의 계보를 촘촘히 짚어낸다. 말콤의 아버지가 가비 운동의 추종자였다는 설정을 통해 흑인 민족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보여주며,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도 드러낸다.

1950-60년대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인종차별은 국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민권운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와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는 FBI의 감시와 탄압도 강화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말콤이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모색했는지를 보여준다.

기억에 남는 명장면들: 시각적 웅변의 순간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감옥에서 말콤이 사전을 베껴 쓰며 스스로를 교육하는 모습이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기혐오에서 자긍심으로의 변화가 한 장면에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덴젤 워싱턴의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장면은 교육의 해방적 힘을 웅변한다.

할렘에서의 첫 연설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다. 우리는 아메리카에 있는 아프리카인이다"라는 말콤의 선언은 기존의 통합주의적 민권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흑인들의 뜨거운 호응과 백인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대조적으로 그려지며 말콤의 파급력을 실감케 한다.

메카 순례 장면은 영화의 전환점이다. 다양한 피부색의 무슬림들과 함께 기도하며 "모든 인종이 하나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말콤의 모습은 그의 사상적 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파이크 리는 이 장면을 통해 증오가 아닌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암살 장면은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이다. 뉴욕 ‘오듀본 볼룸’에서 연설을 시작하려던 말콤이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 영화는 현실의 기록 영상과 교차편집되며 강렬한 현실감을 자아낸다. 특히 부인 베티가 말콤을 부르며 달려오는 장면은 개인적 비극과 역사적 상실이 겹쳐지는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한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복잡한 스펙트럼

‘말콤 X’는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복잡성과 다원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주류였던 당시, 말콤 X는 "필요한 수단에 의한(by any means necessary)" 흑인 해방을 주장하는 급진적 대안을 제시했다.

영화는 킹과 말콤의 대조적인 접근법을 균형 있게 다룬다. 킹이 통합을 통한 평등을 추구했다면, 말콤은 분리를 통한 자주를 강조했다. 킹이 백인들의 양심에 호소했다면, 말콤은 흑인들의 자각에 집중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둘을 대립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1964년 의회 건물에서의 짧은 만남 장면은 두 거인이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말콤의 사상적 변화다. 초기 NOI 시절의 흑백 분리주의에서 메카 순례 이후 범아프리카주의로의 전환은 흑인민권운동 내부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말콤은 미국 내 흑인 문제를 국제적 인권 문제로 확장시켰고, 이는 후에 블랙 파워 운동과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는 또한 계급 문제도 다룬다. 중산층이 주도한 기존 민권운동과 달리 말콤은 도시 빈민층, 범죄자, 마약중독자들에게도 해방의 메시지를 전했다. "집에서 기르는 흑인(house negro)"과 "밭에서 일하는 흑인(field negro)"을 구분하는 그의 유명한 연설은 흑인 사회 내부의 계급 갈등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1992년 개봉의 특별한 의미: 과거와 현재의 만남

‘말콤 X’가 1992년에 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91년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이 발생한 시점에서 말콤의 메시지는 새로운 현실성을 얻었다. "폭력은 미국인다운 것이다(Violence is as American as cherry pie)"라는 그의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영화는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흑인들이 여전히 체계적 차별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말콤의 자주적 해방 사상은 계속해서 영감을 준다. 특히 "자기 존중 없이는 다른 사람의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갖는다.

최근 흑인 범죄자에 대한 체포 과정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해 주로 항의하는 사회 운동인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중요하다)에서도 말콤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백인 중심적 시스템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 자기방어의 권리 주장, 국제연대의 추구 등은 모두 말콤이 제시한 방향과 일치한다.

스파이크 리의 영화적 성취와 비전

감독을 맡은 ‘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역량을 집대성했다. 3시간 20분의 러닝타임 동안 지루함 없이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도, 각 시대마다 다른 색감과 촬영 기법을 사용해 말콤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범죄자 시절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채, 감옥에서의 차갑고 억압적인 조명, NOI 시절의 엄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 그리고 마지막 순례 여행의 밝고 개방적인 영상이 각각 다른 정서를 자아낸다.

또한 실제 역사 영상과 재현 장면을 교묘하게 편집해 다큐멘터리적 사실감과 드라마적 감동을 동시에 달성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넬슨 만델라가 소웨토 학교에서 말콤을 가르치는 장면은 말콤의 유산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계승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마무리다.

작품의 한계와 지속적 의의

‘말콤 X’가 말콤의 복잡한 사상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고, 일부 장면에서는 과도한 감정적 호소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미국 영화사상 흑인의 삶과 투쟁을 이토록 깊이 있고 진정성 있게 그린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결국 이 영화는 말콤 X라는 개인을 넘어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해방 의지를 대변한다. "우리는 내일을 꿈꾸지 않는다. 우리는 내일을 건설한다"는 말콤의 유언은 여전히 우리에게 변화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는다. 스파이크 리는 이 영화를 통해 역사의 무게와 현재의 책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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