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언 강을 건넌 사람들의 우리말 지키기
언 강을 건넌 사람들
19세기 중엽부터 계절 농사를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연해주와 만주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 이민이 시작되었다. 14가구 60명이 1864년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 인근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노령露領 지역의 이주는 2024년 160주년을 맞게 된다.
모국어는 민족 동질성
재러·재CIS동포들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가장 중요한 것이 모국어를 지키려는 노력이다. 민족공동체를 형성한 동포들은 가장 먼저 학교를 설립하였다. 모국어를 교육하고 지켜내는 것이 민족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이라 느껴왔기 때문이다.
동포들이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역할은 고려사범학교(1931년) , 「선봉」신문(1932년), 원동변강조선극장(1932년)이 담당하였다. 이들 기관은 1937년까지 원동지역에서 활동하던 17개의 모국어 신문과 잡지, 1개의 우리말 라디오방송, 350여 개의 조선학교와 고등교육기관, 그리고 수십 개의 악단과 극단을 대표하였다. 350여 개가 넘는 교육기관의 스승을 양성하던 고려사범학교는 강제 이주로 이듬해에 폐교하였다.
민족신문 100주년을 맞이하다
1923년 3월 1일, 연해주에서 「3월 1일」을 창간하였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한 신문은 4호부터 「선봉先鋒·АВАНГАРД」으로 제호를 바꿔 발행하였다.
강제 이주로 폐간된 후, 신문사 직원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 1938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재창간하였다. 카자흐스탄의 독립과 북방외교의 변화에 발맞춰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도 모국어 지면을 갖은 민족신문으로 발행하고 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또는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하여 언 강을 건넌 동포와 다시 죽음의 기차를 타고 중앙아시아 초원에 정착한 이민자에게 신문은 이민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농업기술 등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한민족의 역사와 관습, 그리고 전통에 관한 기사를 실어 동포들이 민족 정체성을 지켜내는 원동력이었다. 1933년부터 연재된 ‘문예 페-지’는 문맹 퇴치는 물론 고려인 문학이 맥을 잇게 하였다.
민족 최초의 해외극장
1920년대부터 크고 작은 예술단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신한촌구락부 연예부와 9년제 조선중학교 연극부원이 합심하여 1932년 「원동변강조선극장」을 창설하였다.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극장이자 지금의 고려극장의 모태이다. 극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점을 두고 지역을 순회하는 이동극장의 형태였다.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나뉘어 운영되던 극장은 1947년 카자흐스탄으로 통합되었고, 현재 알마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고려극장은 한국 고전에 기반을 두거나 역사적 인물을 형상화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고려가요를 우리말로 공연해 고려인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움과 동시에 모국어의 전파자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중앙아시아에 이주하여 공민의 권리를 제한당하였던 고려인에게 몸에 맞는 옷, 맛있는 음식, 따뜻한 집이 되어 한 줄기 빛으로 기능하였다.
그 고장 이름은?
한진의 소설 제목이다. ‘모든 일이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야’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에 대한 이름을 묻는다.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 하는데, 죽어 묻히는 곳이라는 이름은 없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물음에 딸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고향만큼 다정해야 할 그 고장의 이름을 찾지 못한 딸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그런 말을 만들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변명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아마도 그 고장의 이름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려인을 비롯한 재외 동포이고, 너무 바빠 그런 말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닌가 되물어본다. 연수구 함박마을에는 1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환대의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가 160년에 달하는 고려인의 여정에 공감하고 공생을 모색하기를 희망한다.
※ 사진제공 : 고려일보, 안 빅토르(전 고려일보 사진기자), 지나이다 베드로바 이바노브나(한진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