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31] '세상을 바꾼 변호사', 정의를 향한 긴즈버그의 ‘불굴의 행진’
2018년 개봉한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사(On the Basis of Sex)'는 단순한 전기영화를 넘어 한 여성이 어떻게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개인의 의지와 신념이 얼마나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브루클린에서 시작된 꿈
1933년 3월 15일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대공황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버지는 모피상을 운영했고 어머니 셀리아는 의류 공장에서 일했다. 특히 어머니 셀리아는 자신의 교육을 포기하면서까지 오빠의 대학 학비를 댄 여성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딸에게 깊이 심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셀리아는 루스의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상실 속에서도 루스는 학업에 매진해 코넬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54년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한 그녀는 가정을 꾸린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500명의 학생 중 단 9명만이 여성이었던 하버드에서, 그녀는 "남성의 자리를 빼앗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모욕적인 질문을 받으며 공부를 해야만 했다.
시련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의지
하버드에서의 시간은 긴즈버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1956년 첫해에 남편이 고환암 진단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공부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픈 남편의 학업까지 도와야 했다. 어린 딸을 돌보며 두 사람 몫의 공부를 해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학급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남편이 회복 후 뉴욕의 법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기자, 긴즈버그는 컬럼비아 로스쿨로 편입하여 195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뛰어난 학업 성과에도 불구하고 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말처럼 "1950년대에는 전통적인 법무법인들이 유대인을 고용하기 시작했지만, 여성이면서 유대인이고 어머니이기까지 한 조건은 너무 많은 것"이었다. 취업에 실패한 그녀는 결국 컬럼비아 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에드먼드 팔미에리 연방판사의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 ACLU 여성권리 프로젝트
1963년 럿거스 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된 긴즈버그는 1971년 미국시민자유연합(ACLU) 여성권리 프로젝트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성평등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전략은 혁신적이었다.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성차별의 벽을 하나씩 허물어 가는 것이었다.
1968년 모리츠 대 국세청장(Moritz v. Commissioner of Internal Revenue, 1972)은 긴즈버그 법조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 실제 사건은 긴즈버그가 법정에서 최초로 변론한 성차별 소송이다. 63세의 미혼남성 모리츠는 89세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모시던 중 어머니가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와 함께 관절염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아들은 요양원 입원을 거부한 채 유일한 보호자로 혼자 부양을 하게 되었다. 소송은 모리츠의 세금 공제신청이 정부에서 거부되면서 시작되었다.
1968년 당시 내국세법은 부양가족 돌봄 비용에 대한 세금 공제를 여성이 아닌 미혼남성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모리츠는 같은 상황의 여성이나 홀아비는 공제받을 수 있는데 미혼 남성만 배제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면서 국세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성별에만 근거한 악의적 차별은 수정헌법 제5조의 적법절차 조항에 위반된다"고 판단한 재판부가 차별적 조항을 무효화하고 모든 납세자에게 공제 혜택을 확대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모리츠가 승소했다.
이 판결은 내국세법 조항이 위헌 선고를 받은 최초 사례로, 성별에 따른 차별이 헌법 위반이라는 판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긴즈버그의 "남성 차별 사례를 통한 여성 인권 신장" 전략의 완벽한 사례였다. 비록 작은 세금 공제 사건이었지만, 성차별은 양방향으로 작동하고 남녀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미국 성평등 법리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긴즈버그는 이 사건에서 개발한 논리를 바탕으로 대법원에서 6건의 성차별 사건을 변론하여 5승을 거두며, 미국 사회의 성평등 혁명을 이끌어 냈다. 이 작은 사건은 결국 "차별의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대법관으로서의 정의 실현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으로 연방 대법관에 임명된 긴즈버그는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첫 번째 유대인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대법관으로서 그녀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United States v. Virginia) 사건의 다수 의견 작성이었다. 이 판결을 통해 버지니아 군사학교(VMI)의 남성 전용 입학 정책이 위헌으로 판정되었고, 자격을 갖춘 여성들의 입학 길이 열렸다.
2007년 레드베터 대 굿이어 타이어 회사(Ledbetter v. Goodyear Tire & Rubber Co.) 사건에서는 강력한 반대 의견을 통해 성별 임금 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녀는 전통을 깨고 반대 의견을 구어체로 작성하여 법정에서 직접 낭독했으며, 의회에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결과적으로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첫 번째 법안인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 제정되었다.
세상에 남긴 불멸의 유산
긴즈버그는 2020년 9월 18일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췌장암 치료 중에도, 대장암 수술 후에도, 심지어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에도 법정 변론을 빠뜨리지 않았다. 87세까지 대법원 체육관에서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하며, 당시 브라이어와 케이건 대법관보다도 더 많은 무게를 들 수 있었다는 일화는 그녀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그녀의 유산은 법리적 성과를 넘어선다.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실천했다. 그녀가 남긴 "진정한 변화는 법원이 아닌 의회와 입법부에서 나와야 한다"는 철학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보여준다. 그녀는 이름의 이니셜을 딴 별칭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Notorious RBG”(전설적인 긴즈버그)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대중문화 속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세상을 바꾼 변호사'는 긴즈버그의 초기 변호사 시절, 특히 찰스 모리츠 사건을 중심으로 그녀가 어떻게 성평등의 길을 개척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그녀의 개인적 투쟁과 전문적 성취를 균형있게 보여주며, 한 개인의 신념과 노력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은 여성의 권리를 넘어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한 위대한 여정이었다. 그녀가 걸어간 길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성평등 사회의 토대가 되었고, 미래 세대에게는 정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브루클린의 작은 소녀에서 시작해 미국 최고 법원의 정의의 수호자가 된 그녀의 이야기는, 개인의 꿈이 얼마나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