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의 신중년 인생3모작 #14] 자아의 리셋, 의미의 회복이 진짜 퇴직이다
- 직함이 사라져도, 나는 여전히 나여야 한다 -
퇴직 후 첫 월요일 아침, 익숙한 알람이 울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낯선 불안이 스며든다. 30년 넘게 회의와 보고서, 조직의 목표 속에서 살아왔던 한 사람은 이제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는 하루를 맞는다. 손에는 시간이라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는 오히려 공허하다. 그는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직함이 사라지는 순간, 역할로 정의되던 자아는 방향을 잃는다. 퇴직은 단순히 일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 시간이다.
필자 역시 공직에서 퇴직한 이후 오랜 기간 마음의 공백과 싸워야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떠도 목적이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불리던 이름이 사라지자 하루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직업은 생계를 위한 역할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증명해주는 사회적 언어였다는 사실을.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통계청 「고령층 삶의 질 조사(2024)」에 따르면 60세 이상 인구의 45%가 “은퇴 후 삶의 목표를 잃었다”고 답했고, 10명 중 6명은 “퇴직 이후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경제적 어려움보다 존재감의 상실이 더 깊은 상처로 남는다는 뜻이다. 인생 3모작 시대의 진짜 과제는 ‘얼마나 오래 일할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의미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일 것이다.
자아의 리셋은 ‘직업적 나’에서 ‘의미의 나’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신을 직무로 설명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가치를 새롭게 언어화해야 한다. 이 전환의 과정은 인식–관점–실천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인식의 리셋이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을 단순한 경력으로 축소하지 말고, 사회에 남길 지혜의 자산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실패조차 후대의 교훈이 될 때, 인생의 경험은 비로소 가치로 변환될 것이다.
둘째, 관점의 리셋이 필요하다. 일의 의미를 생계의 수단에서 사회적 기여의 통로로 확장해야 한다. 사회공헌, 멘토링, 자원봉사, 강의와 같은 활동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회복의 과정이 될 것이다.
셋째, 실천의 리셋이 필요하다. 남은 삶을 ‘타인과 연결되는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작더라도 꾸준히 행동해야 한다. 새로운 배움과 글쓰기, 후배 상담, 지역 봉사 같은 실천은 자아를 밖으로 확장시키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이제 정년퇴직자는 단순한 ‘퇴직자’가 아니라 전환의 주체로 불려야 한다. 인생 3모작의 주체는 더 이상 직함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사회는 이들의 경험과 통찰을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공공기관과 지방정부는 퇴직자를 위한 ‘자아 리셋 프로그램’을 운영해, 퇴직 이후의 인생 설계를 일·재정·건강 중심에서 자기정체성 회복으로 확장해야 할 것이다. 퇴직 이후의 교육은 단순한 취업훈련이 아니라, ‘나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의미의 회복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의 재정렬에서 시작된다. 하루를 열며 “오늘 나는 누구에게 필요한 사람인가”를 묻는 습관이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퇴직 후의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형성되며, 나눔과 공헌이 곧 정체성의 재구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인생 3모작의 완성은 외적 성취가 아닌 내면의 명확함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나는 지금 어떤 의미로 일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직함 없이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있는가,
매주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루틴이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나를 넘어 더 나은 나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남아 있는가.
이 다섯 질문 중 두 가지 이상이 ‘아니오’라면, 당신의 자아는 아직 리셋되지 않은 것이다.
퇴직은 인생의 문을 닫는 일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문을 여는 일이다. 의미를 잃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만, 의미를 다시 세운 사람은 어떤 변화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자아의 리셋은 과거의 역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는 과정이다. 직함이 사라져도 자신만의 목소리로 사회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짜 은퇴일 것이다. 의미를 회복한 사람은 다시 사회와 연결되고, 그 연결 속에서 삶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인생의 후반기는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며, 자아의 리셋은 그 확장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