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23] '파묘' : 한국의 전통과 역사적 상흔을 파헤치는 현대적 메타포
2024년 상반기 한국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 장재현 감독의 '파묘'는 단순한 오컬트 영화를 넘어 한국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전통문화의 현재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개봉 일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현재 누적 관객 1000만을 넘어서며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줄거리: 과거와 현재의 뒤엉킨 저주
영화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한국계 가문의 후손 박지용의 갓난아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리면서 시작된다. 현대 의학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원인 모를 증상에 고통받던 가족은 마지막 수단으로 한국의 무속인 이화림(김고은)과 그녀의 제자 봉길을 찾아간다. 화림은 문제의 원인이 조상의 묘에 있다고 진단하고, 유명 풍수사 김상덕(최민식)과 장의사 고영근(유해진)을 섭외하여 강원도에 있는 의문의 무덤을 파헤치기로 한다.
일행이 도착한 묘는 산 정상에 위치한 이름없는 무덤으로, 풍수지리상 극히 불길한 '악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상덕은 이곳의 기운을 느끼고 작업을 거부하려 하지만, 결국 화림의 설득으로 '대살굿'과 함께 파묘를 진행한다. 파묘 과정에서 발견된 관 안의 일제시대 훈장들은 이 무덤의 정체에 대한 첫 번째 단서가 된다.
그러나 파묘 후 갑작스러운 폭우로 화장이 지연되고, 관을 임시로 병원 영안실에 안치한 그날 밤, 관이 열리면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탈출한다. 이는 연쇄적인 초자연적 사건들을 촉발시키며, 박지용은 갑작스러운 이상 증세를 보이다 사망하게 된다.
오컬트 영화답게 장재현 감독은 기술적으로 공포의 리듬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촬영은 어둡고 눅눅한 색감을 사용해 무덤과 장례 의식의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조명은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불안을 증폭시키고, 편집은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을 교차시켜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음악은 한국 전통 장단과 현대적 음향을 뒤섞어 이질적 공포를 자아내고, 미술은 낡은 관과 장례 도구들을 디테일하게 재현해 관객을 그 현장에 데려다 놓는다.
풍수지리와 명당묘지의 전통적 의미
'파묘'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풍수지리는 단순한 미신이 아닌, 한국 전통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사상 체계다. 세종대학교 호사카 유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은 사방으로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의 풍수에 맞춰 설계된 도시였다. 이러한 풍수지리 사상에서 묘의 위치는 후손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로 여겨졌다.
영화 속에서 상덕이 보여주는 풍수사의 모습은 단순히 땅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명당과 악지를 구분하는 그의 능력은 과학적 합리성을 넘어선 전통적 지혜의 결정체로 표현된다. 특히 영화에서 '물맛을 보거나 물 색깔을 보고 땅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실제 전통 풍수의 방법론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정기말살과 쇠말뚝의 역사적 맥락
영화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쇠말뚝의 존재는 일제강점기 조선 침탈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일본의 음양사 기쓰네(여우)가 조선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정은 단순한 픽션을 넘어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소재다.
실제로 한반도 각지의 명산에서 발견되어 온 쇠말뚝들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근대적 개발을 위한 측량용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산 정상에 26개나 한곳에 박혀 있었다는 증언과 같은 사례들은 단순한 측량용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논란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신 상징적 메타포로 활용한다. 일본 음양사들이 조선 침략 당시 만 명을 베어 죽여 신이 된 일본 무사의 영혼을 한반도에 박아 넣어 영원한 지배를 꾀했다는 설정은, 물리적 침탈을 넘어선 정신적·문화적 지배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상징
'파묘'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의 음양도와 한국의 전통 무속신앙 간의 대결 구조를 정교하게 그려낸 점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음양도는 1945년 패전까지 국책으로 활용된 체계화된 주술 체계였다. 영화 속 무사 귀신이 반야심경을 독경하며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나, 반대로 주인공들이 반야심경을 몸에 써서 공격을 막으려는 설정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특히 무사 귀신이 "자신은 남산의 조선신궁에 묻혔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은 일제의 정신적 지배 의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대학살을 저지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도요쿠니 신사'의 신으로 모셔져 있으며,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도 신사의 신이 되어 있다. 이처럼 사악한 인물들이 오히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일본의 특이한 문화를 영화는 날카롭게 포착했다.
영화의 현재적 의미와 사회적 메시지
'파묘'는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정체성 혼란을 다룬다. 영화 분석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파묘라는 행위는 물리적 무덤 발굴을 넘어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상징적 행위로 해석된다.
영화 속 '불타는 쇠'인 정령과 '물에 젖은 나무'인 상덕의 대결은 일제강점기의 억압(쇠)과 한국의 전통 지혜(나무)의 대립을 상징한다. 상덕이 자신의 피를 나무 곡괭이 자루에 묻혀 정령을 물리치는 장면은 개인의 희생을 통한 집단의 구원이라는 한국적 서사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가 과거를 단순히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상덕의 딸 연희의 결혼식 장면에서 외국인 사위를 받아들이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선 성숙한 역사 인식을 암시한다.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지점
장재현 감독의 '파묘'는 한국 전통문화와 현대 장르 영화가 만나 탄생한 탁월한 결과물이다. 풍수지리, 무속신앙, 조상숭배라는 전통적 요소들을 현대적 스릴러 문법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장르적 지평을 열었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것에 매몰되지도 않는 성숙한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쇠말뚝을 뽑아내는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닌 치유와 화해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파묘'의 성공은 한국 영화가 자국의 문화적 자산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이 작품은, 앞으로 한국형 장르 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