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의 신중년 인생3모작 #12] 일·돈·관계·건강 – 여가의 리셋

- 퇴직 후의 공백을 설계로 채워라 -

2025-10-27     김한준 논설위원
퇴직 후 인생 재설계를 준비하는 중장년 남성의 이미지 / DALL·E 생성

퇴직은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리듬이 한순간 멈추며 삶의 질서가 바뀌는 사건이다. 매일의 출근길이 끊기고, 이름 앞의 직함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분리된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공기업의 미래설계센터장을 맡아 수많은 퇴직예정자와 마주한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시기가 누구에게나 혼란과 재정립의 시간이며 그 1년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리셋의 기술’을 익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제도가 여전히 사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2020년 제정된 「퇴직자 전직지원법」이 50세 이상 퇴직예정자에게 교육과 상담을 제공하지만, 2024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참여율은 31.2%에 불과했고 그중 70%가 “취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배움은 있지만, 삶으로의 연결은 끊겨 있다. 평생교육 역시 참여율이 41.5%로 OECD 평균보다 낮고, 지역 교육은 대부분 취미·교양 중심에 머문다. 결국 은퇴의 불안은 돈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며, 방향을 설계하지 못한 제도는 공허한 안내판에 불과하다.

퇴직 이후의 삶을 새롭게 세우려면 일·돈·관계·건강·여가, 다섯 축의 균형을 다시 잡아야 한다. 조직을 떠난 사람은 더 이상 톱니바퀴가 아니라 자신을 경영하는 개인사업자이며, 그 변화의 시작은 ‘일의 재정의’에서 출발한다. 많은 이들이 “다시 일할 수 있을까”를 묻지만, 진짜 질문은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이다. 정규직의 틀을 벗어나 경험을 사회에 되돌리는 멘토, 프로보노, 프리랜서, 지역 코디네이터들이야말로 퇴직 후 리더십의 실천자다.

‘돈’의 리셋은 소득의 크기보다 흐름의 감각에 있다. 퇴직금은 자유의 증표가 아니라 시험지이며, 불안은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현금의 리듬이 끊겨서 생긴다. 고정비와 변동비를 구분하지 못한 채 소비하면 불안은 끝이 없다. 12개월 현금흐름표를 작성하고 6개월치 생활비를 비상자금으로 확보하는 단순한 습관이야말로 안정된 노후의 출발점이다. “매달 고정비가 소득의 60%를 넘지 않는가?”라는 점검이 재무 리셋의 핵심이다.

관계는 직함이 아니라 가치로 이어져야 한다. 퇴직과 함께 명함이 사라지면 인간관계의 절반이 흔들리지만, 진정한 관계는 역할이 아니라 의미에서 유지된다. 가족 다섯 명과 배우며 돕는 느슨한 연결 오십 명, 이 작은 네트워크가 퇴직자의 정서적 안전망이 된다.

건강의 리셋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걷기·근력운동·수면의 세 가지 루틴을 지키는 사람은 심혈관 질환 발병률이 47% 낮으며, 은퇴 이후 운동은 취미가 아니라 직무가 되어야 한다. 단골 의사를 확보하고, 하루 루틴을 건강 중심으로 재조정하면 몸과 마음의 리듬이 회복된다.

여가는 감각의 회복이자 자존감의 재생이다. 매일 아침 사진을 찍고 오후엔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한 60대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세상과의 연결은 더 깊어졌다”고 말한다.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성장의 리듬이며, 삶의 만족도를 되살리는 감정의 엔진이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부의 전직지원과 평생교육은 여전히 분절되어 있고, 퇴직자는 배움과 일이 순환하는 구조를 원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협력해 ‘인생3모작 허브센터’를 세워 직업교육·심리상담·재무·건강·문화 프로그램을 통합 지원해야 한다. 또한 기업과 공공기관(공무원 포함)은 퇴직 전 5년–3년–1년의 시기를 직무 전환·멘토링·사회공헌 과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이것이 조직이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인사경영의 핵심이며, 퇴직자를 이탈자가 아닌 자산의 순환자로 전환시키는 사회적 해법이 될 것이다.

이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일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소득의 구조는 명확한가, 함께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루의 루틴 속에 건강의 시간이 있는가, 그리고 여가는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다섯 질문 중 두 가지 이상 ‘아니오’라면, 당신의 리셋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설계의 시작이다. 복지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리듬을 다시 세우는 일이며, 행복한 은퇴는 운이 아니라 준비의 결과다. 리셋한 사람은 두려움을 넘어 단단한 인생으로 돌아가며,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된 표정이 있다.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 미소가 바로, 리셋이 완성된 얼굴이다.

퇴직 은퇴설계 전문가 |LH공사 미래설계지원센터장(전) | 평생교육학 박사 | 논설위원 김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