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17] '서울의 봄' : 역사의 아픔과 미완의 정의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밤 중 하나를 담았다. 김성수 감독이 연출하고 황정민, 정우성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단순한 정치 스릴러를 넘어서, 한 나라의 운명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피격 사망한 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서울의 봄'이라 불린 짧은 자유화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전두환과 하나회로 대표되는 신군부 세력의 야욕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하나회와 군부 내 갈등의 뿌리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11기를 중심으로 결성된 불법 사조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 영화에서 전두광(전두환)으로 분한 황정민은 이 조직의 수장으로서 권력에 대한 집착과 냉혹함을 완벽하게 연기해 냈다.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 18년의 독재가 갑작스럽게 끝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하에서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합법적인 지휘체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전두환은 김재규와의 연루 의혹을 빌미로 정승화를 제거하려 했다.
1979년 12월 12일, 그 긴박했던 9시간
영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날 밤의 긴박한 상황을 재현한다. 전두환 일당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2월 7일 전두환과 노태우가 만나 정승화 총장 연행 계획을 논의했고, 12월 9일에는 구체적인 체포 계획을 수립했다.
12월 12일 저녁, 허삼수가 이끄는 체포조가 정승화 총장 공관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가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동시에 전두환은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사후 승인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영화에서는 이태신)은 이 상황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은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이미 1공수여단, 3공수여단, 9사단 등 주요 부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고, 특전사령관 정병주까지 체포하며 군 지휘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두환의 집권: 5.17 쿠데타와 광주의 비극
12.12 사태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사실상 두 번째 쿠데타를 감행했다. 김대중, 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맞서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집권은 철저히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고, 국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다. 1981년 2월 정식으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이후 7년간 강압적인 군사정권을 이끌었다.
노태우의 6.29 선언과 기회주의적 집권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하자 전두환은 후계자인 노태우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노태우는 6월 29일 '국민의 대통합과 위대한 국가발전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약속한 이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노태우의 6.29 선언은 진정한 개혁 의지보다는 정권 연장을 위한 전술적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는 12.12와 5.18의 공범이면서도 민주화의 공로자인 양 행세하며 집권의 기회를 노렸다. 전두환 역시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간접적인 권력 연장을 꾀했다.
김영삼-김대중 분열과 '3김' 시대의 비극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의 최대 실책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였다. 두 사람 모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개인적 야심과 지역감정에 휘말려 분열을 택했다.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며 정통 야당의 맏형임을 자처했다. 부마항쟁의 배경이 된 부산·경남 출신으로 영남권의 지지를 기대했다. 반면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결성하며 호남권을 기반으로 했다. 두 사람의 분열은 결국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결과,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를 합치면 55.1%로 노태우를 압도했지만, 분열로 인해 군부 출신에게 정권을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큰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1987년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의 비극적 종말
노태우 집권 이후 전두환은 1988년 국정감사에서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특히 광주 청문회에서 윤한봉 증인이 전두환에게 "각하, 도대체 왜 그랬습니까?"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온 국민을 울렸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지만, 진정성 있는 반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3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두 전직 대통령의 과거가 본격적으로 심판받기 시작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사건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 화해'를 명분으로 두 사람을 특별사면한 것이다. 전두환은 실제로는 2년여, 노태우는 1년 4개월만 복역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두환은 2021년 11월 23일 90세로 사망했다.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5·18에 대한 사죄 한 마디 없이 떠나 안타깝다"는 것이 광주의 목소리였다. 그는 끝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부르며, 자신이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등 반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노태우는 한 달 앞선 2021년 10월 26일 89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5·18에 대한 사과의 뜻을 내비쳤지만,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평가는 여전히 차갑다. "너무 늦은 사죄"라는 것이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늦은 집권
분열로 인해 1987년 집권에 실패한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후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 정권과 3당 합당을 통해 집권 여당에 합류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이는 '배신'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1992년 대통령 당선의 발판이 되었다.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으로 재임(1993-1998)하면서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임기 말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불명예 퇴진했다.
김대중은 1992년, 1997년 연이은 대선 도전 끝에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98-2003). 그는 IMF 위기를 극복하고 북한과의 화해를 추진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승화와 장태완의 명예 회복
반면 12.12 사태의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야 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사건 당일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이등병으로 강등되어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그는 1993년 장태완 등 22명과 함께 전두환·노태우를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영화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12.12 당일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최초의 직선 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27대·제28대 회장을 연임했다. 두 사람은 강연과 회고록을 통해 그날의 진실을 증언했고, 민주화 이후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음을 역사적으로 입증받았다.
두 장군 모두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명예가 회복되었다. 정승화는 2002년 별세했고, 장태완은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늦은 명예회복은 한국 현대사의 아픈 단면을 보여준다.
미완의 정의와 역사의 교훈
‘서울의 봄’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2023년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화제가 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개인의 신념과 원칙이 얼마나 견고할 수 있는가'이다. 전두광으로 분한 황정민의 연기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반면 이태신 역의 정우성은 원칙과 신념을 지키려는 군인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죽음으로 12.12와 5.18의 진실 규명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죽음은 완전하지 못한 과거사 청산의 한계를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아직도 5.18 관련 기록들이 은폐되어 있고,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문도 남아있다.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역사의 정의는 언제 실현될 것인가? 44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속 그 긴박했던 9시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민 한 명 한 명의 깨어있는 의식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보다는 화합을, 개인적 야심보다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