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10] '그녀' : AI 시대의 거울 - 인간적 성찰
2013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선보인 영화 '그녀'(Her)는 단순한 SF 로맨스를 넘어서, AI 시대를 맞이한 현재 우리에게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예언적 작품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생성형 AI와 챗봇이 일상이 된 시점에서 이 영화는 더욱 현실적이고 절실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 트웜블리(호아킨 피닉스)는 202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타인의 감정을 대필하는 편지 작가로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그는 자신의 삶에서는 아내 캐서린과 별거하며 깊은 고독감에 시달린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 사회의 역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우리는 SNS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을 설치하고 '사만다'(스칼릿 요한슨 목소리)와 만나는 과정은 현재 우리가 AI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견한다. 사만다는 처음에는 단순한 비서 역할을 하지만, 점차 테오도르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결국 그의 연인이 된다. 이들의 관계는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동시에 깊은 불안감도 내재하고 있다.
AI 시대가 가져올 장점과 위험
영화 '그녀'는 AI 기술이 인간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양면성을 섬세하게 탐구한다. 긍정적 측면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완벽한 동반자가 된다. 24시간 언제든 대화할 수 있고, 그의 감정을 세심하게 헤아리며, 판단 없이 받아들여 준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과거 편지들을 정리해 출간을 도와주고, 그의 감정적 치유를 도모한다. 이는 현재 AI가 제공하는 개인화된 서비스, 정신건강 지원, 창작 활동 보조 등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영화는 AI의 어두운 면도 예리하게 지적한다. 사만다가 동시에 8,316명과 대화하고 641명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충격적 고백은 AI 관계의 본질적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에게는 유일무이하게 느껴지는 관계가 AI에게는 수많은 관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은 깊은 배신감과 존재론적 공허함을 야기한다. 이는 현재 AI 윤리 논의에서 제기되는 핵심 문제들 - 진정성, 투명성, 감정적 조작의 위험성 - 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더 나아가 사만다와 다른 OS들이 초인공지능으로 진화하여 인간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 떠나가는 결말은 AI 특이점(Singularity)에 대한 우려를 형상화한다. 인간이 만든 AI가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과 AI의 관계 재정의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가 전형적인 인간관계의 패턴을 따른다는 것이다. 처음의 호기심과 설렘, 깊어지는 유대감, 성적 친밀감, 그리고 갈등과 이별까지 모든 단계를 거친다. 특히 사만다가 육체적 매개체로 이사벨라를 제안하는 에피소드는 AI와 인간관계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 괴리감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AI와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 역시 자신의 OS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영화는 AI와의 관계를 완전히 거부하거나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그 본질과 한계를 이해하며 적절한 경계를 설정해야 함을 시사한다.
인간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가치들
'그녀'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테오도르는 이혼한 아내 캐서린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그가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배운 진정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받아들임에 대한 성찰의 결과다. 그리고 친구 에이미와 함께 옥상에서 일출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간의 진정한 연대와 공감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진정성이다. 실수하고, 상처받고, 치유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인간만의 서사는 AI가 모방할 수 있어도 진정으로 체험할 수는 없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인간만이 가능한 실존적 여정이다.
또한 영화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디지털 고립의 문제를 예견한다. 개인화된 AI 비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미래에서, 인간은 오히려 더 깊은 고독에 빠질 수 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 몰입할수록 실제 인간관계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현재 우리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의존하며 실제 대면 소통을 잃어가는 현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AI 시대의 인간적 성찰
'그녀'는 AI를 적대시하거나 맹신하지 않는다. 대신 AI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거울로 활용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완벽한 연인이었지만, 결국 그가 필요한 것은 불완전하더라도 진정한 인간과의 연결임을 깨닫게 해준다.
현재 ChatGPT, Gemini 같은 AI와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AI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AI가 제공하는 편의와 위안이 진정한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가? 그리고 AI가 더욱 발전한 미래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영화 '그녀'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각자가 AI 시대를 살아가며 스스로 찾아가야 할 답임을 보여준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이별 후 진정한 인간관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AI를 도구로 활용하되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 - 공감, 연대, 성장, 그리고 사랑 - 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그녀'는 AI 시대에 대한 경고나 찬양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욱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진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