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9] 가면 뒤의 진실 : '브이 포 벤데타'가 던지는 경고와 희망

2025-09-29     유석하 논설위원
이미지 / whisk 생성

2006년 개봉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와 저항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우화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장이다.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가면을 쓴 V라는 인물을 통해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닌가?

통제와 감시사회의 완벽한 초상

영화가 그려내는 미래의 영국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노스파이어 정권은 정보를 통제하고, 시민들을 감시하며, 두려움을 조성해 권력을 유지한다. BTN 방송국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프로파간다와 허위 정보는 현대의 가짜 뉴스와 미디어 조작을 연상시킨다.

정부는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시민들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핸드폰 도청과 CCTV 감시를 일상화한다. 이는 9.11 테러 이후 강화된 국가 감시 체제와 현재의 디지털 감시사회를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라크힐 수용소에서 벌어진 생체실험과 자작극 테러는 권력이 어떻게 공포를 조작해 통제를 정당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욱 섬뜩한 것은 이러한 통제가 점진적으로, 그리고 시민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편의를 위해 사생활을 내어준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정보 수집과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시민들의 무지와 각성의 과정

영화는 시민들이 어떻게 무지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각성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비 해몬드(나탈리 포트만)라는 인물은 처음에는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녀는 BTN에서 일하며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일조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V와의 만남과 일련의 경험을 통해 이비는 점진적으로 각성한다. 특히 가짜 감옥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용기를 일깨운다. 발레리 페이지의 편지를 통해 그녀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진실성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마지막 것"이라는 메시지는 개인의 존엄성과 신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각성 과정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산된다. 영화 말미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는 장면은 집단적 각성의 상징이다. 이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다.

V가 갖는 다층적 의미

V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복수자나 테러리스트를 넘어서는 복합적 상징이다. 생체실험실 라크힐 ‘수용소 V방’에 있던 수감수가 사상적 신념에 찬 저항자로서 ‘승리의 V’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담는다. 그는 개인이자 동시에 이념이며, 복수자이자 동시에 해방자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은 역사적 저항정신의 계승을 의미한다. 동시에 얼굴이 없는 가면은 그가 특정 개인이 아닌 보편적 저항 의지의 화신임을 나타낸다.

V의 폭력적 방법론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행동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기존 질서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의 창조를 의미한다. 그가 런던 중앙형사법원인 ‘올드 베일리’(Old Bailey)를 폭파하는 것은 부패한 정의를 상징하는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국회의사당을 파괴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왜곡한 권력 구조를 해체하는 상징적 행위다.

특히 중요한 것은 V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스스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독재자가 되려 하지 않으며, 시민들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Idea is bulletproof"(이념은 총알도 막을 수 없다)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물리적 존재를 넘어선 정신의 불멸성을 의미한다.

세익스피어와 문학적 전통의 계승

영화 전반에 걸쳐 V가 인용하는 세익스피어의 대사들은 단순한 교양의 과시가 아니라 서구 문명의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는 『맥베스』와 『헨리 5세』의 대사를 통해 권력의 부패와 정당한 저항의 논리를 설파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 장면에서는 "분열되고 투쟁하는 현실 세계의 아픔"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드러난다.

이러한 문학적 인용들은 V가 단순한 폭력주의자가 아니라 깊은 사상적 배경을 가진 지식인임을 보여주며, 동시에 전체주의 사회에서 문화와 교양이 어떻게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특히 "Remember, remember the 5th of November"라는 가이 포크스의 전통적 운율은 역사적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의 ‘화약 음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다. 개신교 통치자인 제임스 1세와 의회를 폭파하여, 가톨릭 신자에게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했다. 국회의사당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의회가 개회하는 날에 폭파시키려 했으나, 11월 5일 새벽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Remember, remember the 5th of November Gunpowder, treason and plot...” 이 유명한 시구로 시작되는 노래는 영국 어린이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1월 5일을 상징한다. 이제 과거의 저항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억압에 맞서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불의에 맞선 용기와 저항정신

V의 저항은 개인적 복수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보편적 정의를 향한다. 라크힐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경험은 그를 복수자로 만들었지만, 그의 행동은 단순한 사적 복수를 넘어 사회 전체의 해방을 지향한다. 이는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 각성의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V가 직접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행동을 통해 저항한다는 것이다. 방송국 점거를 통한 진실 폭로, 예술 작품과 금서의 보존, 그리고 시민들에게 가면을 배포하는 행위는 모두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문화적 저항이다.

이비의 변화 과정 역시 용기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처음에는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소시민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를 기른다. 가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V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 장면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교훈

‘브이 포 벤데타’가 우리 시대에 주는 교훈은 다층적이다. 첫째, 자유는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편의와 안전을 위해 조금씩 포기한 자유들이 결국 전체주의의 토양이 된다는 경고는 현재진행형이다.

둘째, 정보의 중요성이다. 가짜 뉴스와 정보 조작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진실을 구별하고 전파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BTN의 프로파간다와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셋째, 개인의 각성이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이비의 변화 과정이 보여주듯, 한 사람의 각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결국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넷째, 저항은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V의 폭력적 저항이 극단적 사례라면, 예술가 고든의 풍자나 이비의 진실 추구는 일상적 저항의 형태다. 중요한 것은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가면 너머의 진실

결국 ‘브이 포 벤데타’는 가면이라는 상징을 통해 정체성과 진실의 문제를 탐구한다. V의 가면은 개인을 숨기는 동시에 보편적 의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가면을 벗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진정한 V는 가면 속의 한 개인이 아니라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화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은 간단하다. 당신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안전하지만 자유가 없는 사회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자유로운 사회인가?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V의 마지막 말처럼, 이념은 총알도 막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떤 억압으로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순간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다. 가면을 벗을 용기와 진실을 말할 용기, 그것이 바로 V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이다.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