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무의 영화로 세상읽기 #8] 시간을 초월한 민주주의의 교과서 '12인의 성난 사람들'

2025-09-26     유석하 논설위원
이미지 / whisk 생성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57년 작품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단순한 법정 영화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걸작이다. 한 방 안에서 벌어지는 96분간의 치열한 토론은 사법제도의 본질과 인간의 편견, 그리고 진실을 향한 의지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영화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푸에르토리코계 소년의 재판을 배경으로 한다.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없는 방에 모인 12명의 배심원들은 처음에는 명백해 보이는 유죄 판결을 서둘러 내리려 한다. 검찰의 증거는 확실해 보였고, 목격자들의 증언도 일치했다. 더욱이 7번 배심원처럼 "빨리 끝내고 양키스 경기나 보러 가자"는 식의 안이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 8번 배심원(건축가 데이비스)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며 무죄에 손을 든다. 그의 용기 있는 한 표는 나머지 11명의 분노를 산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다.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진실을 향한 치열한 토론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편견이라는 거대한 벽

영화의 핵심은 각 배심원들이 가진 편견과 선입견이다. 10번 배심원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저놈들(빈민가 이민자들)은 천성이 폭력적"이라며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3번 배심원은 자신의 아들과의 갈등을 피고에게 투영하며 사적 감정으로 판단을 흐린다. 12번 배심원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다수 의견에 휩쓸리기 일쑤다.

이들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다. 각 배심원은 서로 다른 직업과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편견이 얼마나 다양하고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 5번 배심원(빈민가 출신 응급구조사)이 10번의 차별 발언에 분노하는 장면은 편견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배심원제도의 이중적 의미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배심원제도의 양면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무작위로 선발된 배심원들의 다양한 배경은 오히려 그릇된 평결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포함된 "위대한 소수자"가 명료한 이성과 단단한 논리로 다른 이들의 양심을 깨울 때, 어떤 직업 법관보다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이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8번 배심원의 차근차근한 반박은 감정이 아닌 논리에 기반한다. 그는 살인 무기인 잭나이프의 희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노인 증인의 증언 시간을 실제로 재현해 보며, 안경을 쓴 여성 증인의 증언 신빙성을 검토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배심원들은 하나씩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진실에 다가간다.

주요 장면들의 상징적 의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10번 배심원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낼 때, 나머지 배심원들이 모두 등을 돌리는 순간이다. 이는 편견과 혐오가 얼마나 고립적이고 반인간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유죄를 주장하던 4번 배심원(냉철한 주식중개인)조차 10번에게 "입을 다물라"고 일갈한다.

마지막에 3번 배심원이 아들과 찍은 사진을 찢으며 오열하는 장면은 개인적 상처가 어떻게 타인에 대한 판단을 왜곡시키는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의견 변경이 아닌, 자아 성찰과 치유의 과정이다.

한국의 국민참여재판과의 비교

한국은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만 20세 이상 국민 중 무작위로 선정된 5-9명의 배심원이 형사재판에 참여하여 유무죄와 양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미국식 배심제와 달리 배심원의 평결이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판사는 배심원의 의견과 다른 판결을 내릴 때 그 이유를 명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은 여러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피고인의 신청에 의해서만 진행되며, 실질 출석률이 50% 미만에 그치고 있다. 더욱이 정작 국민적 관심사가 큰 사건들이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법제도 존재 의미에 대한 성찰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제기하는 근본적 질문은 ‘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법은 단순히 조문의 적용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8번 배심원이 보여주는 것은 법적 전문 지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진실에 대한 의지다.

영화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법적 원칙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한다. 완벽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는 법제도가 존재하는 궁극적 이유, 즉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함임을 상기시킨다.

현대적 교훈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인간 본성의 보편성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이성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각별하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현시점에서, 진정한 사법개혁의 방향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가진 편견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는 성찰과 대화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우리가 가진 최선의 선택임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려는 개인들의 의지와 용기다. 8번 배심원 데이비스의 외로운 한 표가 결국 진실을 밝혀낸 것처럼, 민주주의는 소수의 양심 있는 목소리에서 시작되어 다수의 공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이 영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넘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배심원이 될 수 있고, 그때 우리의 편견을 내려놓고 진실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영원한 화두다.

사회평론가/(전)인천대 교수/사회학 박사.사회복지학 박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