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의 신중년 인생3모작 #6] 퇴직 이후의 품격, 공동체와의 연결
“형님, 요즘 퇴직하고 뭐 하세요?”
“음… TV 보거나 혼자 산책하는 정도지. 괜히 모임 나가기도 어색하고.”
“저는 작은 봉사 모임에 나갔는데, 의외로 즐겁습니다. 동네 분들과 금방 친해졌어요.”
짧은 대화 속에는 퇴직 이후 삶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담겨 있다.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점점 고립되는 경우와, 작은 모임이라도 발을 들여 공동체와 다시 연결되는 경우다. 마치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 은둔을 끝내고 코제트와 함께 세상과 다시 소통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는 장면처럼, 사람은 타인과 관계 맺을 때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통계청의 2024년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고령층 가운데 33.5%가 “퇴직 후 가장 두려운 것은 외로움”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퇴직 직후 2~3년 동안 인간관계의 폭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는 연구도 있다. 직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네트워크가 사라지고, 지역 사회나 새로운 모임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사회적 단절’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는 희망적이다. 2024년 노사발전재단 우수사례집에는 마을 봉사단에 참여한 한 퇴직자가 소개되었다. 그는 처음엔 낯설어 망설였지만, 매주 경로당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며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내가 아직 필요하구나”라는 감각은 단순한 취미 이상의 의미였다. 봉사와 공동체 참여는 퇴직 이후 자존감을 회복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도 다양한 플랫폼이 만들어지고 있다. 수원문화재단은 ‘동호회 검색 서비스’를 통해 관심사별 모임을 쉽게 찾도록 하고 있으며, ‘시놀’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는 여행·걷기·봉사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연결한다. 이들 플랫폼은 고립감을 줄이고, 오프라인 모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한다. 마치 영화 〈인턴(The Intern,2015)>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시니어 인턴십을 통해 회사 동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모습처럼, 공동체는 퇴직 이후에도 여전히 인생의 무대를 마련해 준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문화여가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거주 고령층의 문화시설 이용률은 60%에 달했지만 농어촌은 30%대에 불과했다. 공동체 참여의 기회 자체가 지역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경로당이나 노인교실 같은 시설이 전국적으로 7만 개소 운영되고 있지만, 단순 모임 공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퇴직 이후 공동체 연결은 개인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지역 기반 인프라와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지역 격차 해소다. 각 지자체는 ‘50+ 문화복지센터’를 권역 거점으로 지정하고,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평생학습·문화·봉사를 통합 지원하는 복합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퇴직 전 준비다. 기업과 공공기관은 재직자 대상 퇴직 전 교육에 ‘공동체 활동 체험’을 포함해, 퇴직 직후 자연스럽게 지역사회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인식 전환이다. 퇴직자를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지역의 자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퇴직 이후의 품격은 결국 ‘관계의 품격’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나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공동체 자본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약화된다”라고 경고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망이 끊어지면 삶은 좁아지고, 연결될 때 비로소 확장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혼자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작은 모임에라도 발을 들여 공동체와 다시 연결될 것인가. 괴테의 말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을 가장 잘 발견한다.” 퇴직 이후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품격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