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준의 신중년 인생3모작 #1] 은퇴했다고요? 퇴직했을 뿐인데요
- 인생 3모작 시대의 오해와 진실 -
“아, 드디어 은퇴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아니요. 저는 그냥 퇴직한 거예요. 은퇴는 아직 안 했어요.”
“에이~ 그게 그거죠. 정년이면 은퇴죠.”
“아뇨. 퇴직은 직장에서 물러나는 거고, 은퇴는 ‘일’과 ‘사회 역할’에서 은둔하는 거예요. 아직 저는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이 짧은 대화는 한 행정복지센터 퇴임식에서 실제로 오간 이야기다.
정년퇴직을 한 60세 공직자는 “나는 퇴직했을 뿐, 은퇴하지 않았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는 주민자치위원, 디지털 교육 강사, 청년 멘토로 다시 지역사회에 나섰다. 그를 본 이들은 “어떻게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나”라며 감탄했지만, 진짜 주목할 점은 퇴직과 은퇴를 명확히 구분 짓는 그의 인식이었다. 그 인식 하나만으로 그는 이미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과 은퇴를 같은 개념으로 여긴다. 하지만 퇴직은 고용 계약의 종료라는 제도적 사건에 가깝고, 은퇴는 스스로 사회적 역할에서 물러나는 삶의 결정이다. 퇴직은 직장의 문을 닫는 일이고, 은퇴는 인생의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일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직장을 떠남과 동시에 존재의 이유까지 내려놓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이는 퇴직 후 리모컨을 붙잡고 하루를 보내며 무기력에 빠지고, 누군가는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 자존감도 함께 내려놓는다. 사회적 역할에서 물러났다는 자각은 곧 ‘쓸모없음’이라는 심리로 이어지며, 자신을 마치 쓰임 다한 도구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퇴직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퇴직을 곧 은퇴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관념 때문이다. 은퇴는 타인에 의해 강제되는 통보가 아니라, 자기 의지와 설계로 선택하는 전환점이다.
최근에는 퇴직 이후의 삶을 ‘2모작 인생’으로 설계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농촌에서 이모작은 두 번 수확하는 생활 방식이었지만, 도시에 사는 중장년들도 비슷하게 삶을 다시 짓고 있다. 논밭 대신 커뮤니티 센터나 도서관이 삶의 무대가 되고, 쟁기 대신 태블릿과 스마트폰이 새로운 도구가 된다. 본질은 다시 시작하겠다는 ‘태도’에 있다.
2모작은 경제활동 이후에도 일이나 사회 참여, 자기 성장을 위한 새로운 구조를 말한다. 수익보다는 의미를 좇고, 규모보다는 소소한 실천에 가치를 둔다. 골목 교사, 도서관 큐레이터, 민원 스트레스 상담 강사 같은 역할이 그 예다. 이들은 ‘아직 쓰임이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회복하며,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더 나아가 지금 우리는 ‘3모작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기대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진 지금, 60세 정년은 끝이 아니라 전반부의 마침표일 뿐이다. 생애를 세 단계로 나눈다면, 1모작은 학습기, 2모작은 경제기, 그리고 3모작은 자아실현과 사회공헌, 자유로운 삶 설계의 시기다. 은퇴는 삶의 종결이 아닌, 삶의 목적을 다시 묻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은 “2모작도 벅찬데 3모작까지 하라니”라며 망설인다. 그러나 3모작은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 없다. 주 1회 강의, 월 1회 자원봉사처럼 작은 실천도 충분하다. 중요한 건 그 일을 생계가 아닌 ‘성장’의 수단으로 보는 시각이다. 명함 뒤의 직함이 아닌 ‘이름 자체’로 삶의 메시지를 드러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퇴직 이후에도 자신을 다시 서사화해야 한다. 과거의 직함이 아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 서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제2막·제3막 인생을 여는 선언문이 된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듣게 된 대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퇴직하니 뭐하세요?”
“이제 제 인생 일기를 씁니다.”
그는 실제로 퇴직 후 그림일기를 쓰고, 지역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손주에게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는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무대를 새로 열었고, 지금도 여전히 바쁘게 쓰이고 있는 사람이다.
결국, 퇴직은 당신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은퇴는 아직 당신이 결정하지 않았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당신의 2모작, 3모작은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 것인가?